문학에서의 논리적 판단(북방에서, 미궁의 문, 묘비명)
안녕하세요 독서 칼럼 쓰는 타르코프스키입니다.
Q. 원숭이, 바나나, 팬더 중 관련된 두 개와 나머지 하나를 묶는다면?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 보통 서양 사람들은 범주에 입각해서 원숭이와 팬더를 하나로 묶지만, 동양 사람들은 관계에 입각해서 원숭이와 바나나를 하나로 묶는다고 합니다.(범주적 판단과 유추적 판단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사고의 본질: 유추, 지성의 연료와 불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와 에마뉘엘상데의 책을 참조하세요. 범주는 유추와 별개의 판단이라는 통념을 비판하고, 유추야말로 진정한 사고의 본질이라는 내용의 뛰어난 논증을 제시하는 책입니다.)
둘 모두 틀린 접근이 아니지만, 문학 문제를 풀 떄는 이렇게 아리송한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Q. 사과, 레몬, 탁구공 중 유사한 두 개와 나머지 하나를 묶는다면?
이 질문에서도 여러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먹을 수 있는 사과와 레몬을 고를 수도, 구 형태인 사과와 탁구공을 고를 수도, 노란 빛깔인 레몬과 탁구공을 고를 수도 있습니다.
배고프면 탁구공을 먹을 수도 있지 않냐? 품종개량된 노란 사과도 있지 않냐?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창의적 생각들을 금지합니다.
문학 시험에서도 그런 사태가 자주 벌어집니다. 2004년 "미궁의 문" 문제에서 백석의 시와 그리스 신화를 연결하려다가 복수정답이 인정되는 경우도 있었죠. 새로운 관점의 감상은 매우 장려할 만한 것이지만, 객관식 선택형 문제로 출제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습니다. 결국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이 문제가 정말 오류인 걸까요? 나무위키에 따르면 출제위원 7명 중 4명만 오류가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하고, 최종적으로는 복수정답으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국어 시험에는, 특히 문학에서는 만고불변의 진리 같은 걸 상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가 만일 행정소송으로 가서 대법관들에게 맡겨졌다면 전원합의체에서 만장일치 의견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겁니다. 미궁의 문이 무슨 대단히 철학적이고 첨예한 논쟁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언어에는 원래 불확정개념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개별 선지가 애매할 때, 반드시 5개의 선지를 모두 체크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시험이 끝난 후에 수험생들은 어떻게든 문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겠지만, 실제 시험장에서는 확률이 가장 높은 선지를 고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논리적으로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틀린 부분을 찾아내야 합니다. 논리가 정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출제자들은 애매한 선지로 함정을 팔 때 빠져나가기 위해 매우 지엽적인 트릭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5학년도 9월 <북방에서> 24번 문제도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화자는 분명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때 자작나무가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에 쫓긴다고 합니다. 이 경우 화자는 북방에서 떠날 때 (어떠한 형태로든) 슬픔을 느꼈다고 해야할까요 아닐까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는 입장에서는, 표면적 텍스트에 충실하게 읽고, '이제'와 '그때'를 비교해서 반대해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리해석과 반대해석은 법학에서도 많이 활용되는 타당한 방법이지만, 어떠한 해석방법론도 절대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보통 체계적 해석, 목적론적 해석을 동원해서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합니다)
논리학에는 모순율이라는 게 있습니다. 슬픔을 느끼면서 동시에 느끼지 않았다는 명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해를 해줘야 합니다. '이제는 이기지 못할 슬픔을 느꼈다'의 반대해석은, 이전에는 "슬픔을 느끼긴 했지만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가 될 수도 있고, 이전에도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했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분명 애매한 부분이 있고, 따라서 출제오류라고 생각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작나무가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는 표현 자체는 슬픔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될 여지가 큽니다. 자작나무가 슬퍼했다고 내가 느낀 이유는 나도 슬퍼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슬퍼하는 자작나무가 "나의 슬픔"을 드러냈다는 감상은 허용가능한 추론입니다. 종합해보면 그때 나는 "슬픔을 느끼긴 했지만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라고 보는 것이 모순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출제자는 이러한 논리적 근거에 기반해서 선지를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표현적인 측면에서도, 굳이 '이기지 못할 슬픔'이 없었다고 언급하는 것은 적어도 다른 수준의 슬픔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형식논리상 100% 타당하지는 않더라도) 맥락상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자작나무와 나의 정서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한 것이 맞습니다. 예컨대, 자작나무는 북방에 남아 있는 입장이고 나는 북방을 떠나는 입장입니다. 나는 슬프지 않았지만, 자작나무가 나와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처럼 내가 느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두 표현에 함축된 정서가 완전히 동일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 선택지에서 찝찝함을 느끼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만일 "의인화된 자작나무가 슬퍼했다는 부분과 화자가 스스로 이기지 못할 슬픔은 아니었다는 부분의 정서가 대조를 이루어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라는 선택지가 있다면 틀렸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가상의 선지는 실제 2번 선지와 반대말처럼 보이지만, 둘 다 적절한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작나무 = 화자, 혹은 자작나무 =/= 화자 라는 식으로 도식화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문제에서 미궁의 문과 실 모두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험에서 2번이 옳게 처리되었다는 이유로 반드시 화자가 슬픔을 느꼈다고 해석해야만 한다는 식의 설명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2018 수능에서 김광규의 묘비명 문제도 많은 논리중심적인 학생을 괴롭혔습니다. 어떤 해설들은, 시인은 '한 줄의 시를 읽지 않는 삶'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게 살 수 없다고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은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본문에서 행복하게 산 사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이 반드시 좋은 삶, 훌륭한 삶을 보장하는 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시인의 관점에서 적어도 누군가는 시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논리적인 해설은 다른 지점을 파고듭니다. '묘비명'이 표상하는 시는 결코 화자가 지향하는 시가 아닙니다. 따라서 화자의 관점을 드러내는 시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단, 결과적으로 묘비명을 보고 화자가 누군가는 시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 선지가, "묘비명이 표상하는 시는, 화자로 하여금, 시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라고 건조하게 표현했다면 틀린 선지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시적 정서와 주제에 공감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출제자의 의도는 시 전체의 주제를 반영할 가능성이 크고, 시간이 없다면 이를 이용해서 찍고 넘어가는 스킬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깊이 고민할 여력이 있다면, 선지의 디테일한 표현을 잘 분석해야 합니다. 시적 정서는 일종의 1차적 탐지기와 같이 활용될 수 있지만, 최종적인 판단은 논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논리가 허용하는 범위 내의 해석은 허용 가능한 것으로 처리하고, 고민되는 선택지들 사이에서는 결국 감으로 찍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슬퍼하는 자작나무가 "나의 슬픔"을 드러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판단은 합리적이지만, 절대 나의 슬픔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합리한 판단입니다. 이러한 미묘한 지점에서는, 선지의 형태나 내용을 스스로 바꿔가면서 감을 익히는 것이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분자 모양이 꼴려요
-
대치 특별전형 합격 가능한가요? 장학 말고 그냥 합격만 되면 되는데
-
는 취향차이
-
미적 28 30 맞고 29번 틀린 사람을 뭐라고 부름 11
왜틀렸는지 아직도 모름
-
어라?
-
논술 개씹노베인데 의논이나 약논 하려면 재능충이어야 함ㅍ? 재능 있는지는 어케 아냐
-
크와아아앙 16
프로틴먹고 독서실 가기 공부하기 싫다
-
신입생들을 위한 아르바이트 추천 [과기대25] [서울과학시술대학교신입생꿀팁] 0
대학커뮤니티 노크에서 선발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선배가 오르비에 있는 예비 과기대생,...
-
많이 없을듯 다들 사랑해
-
만남은 쉽고 6
이별은 어려워~~ ㄹㅇ 맞말인듯
-
기상쌤 수업 이번이 처음인데 듣기전까진 수업내용으로 웃기실 줄 알았는데 에스파냐어...
-
수학 노베 0
고1 부터 수학 아예 안했으면 공통수학 1, 2 부터 하는 게 맞는거야? ㅈㅂ 나 4등급은 맞고싶어
-
소신발언 :저 짤 한정 ㄹㅇ닮아보이긴 함..
-
올해 중3으로 올라가는 학생입니다. 지금이야 예비중3이지만 몇 개월만 지나도...
-
레어 질문좀 3
이거 용도가 뭐임?
-
선착순 전형인디 언제 마감되려나여ㅠ
-
나도 부남 하고 싶었는데
-
노래 추천 해주세요 주고 받기
-
꽃츄먹고싶다 12
이상한거 아니니 오해ㄴㄴ
-
답답해 답답해 예비2번은 답답해
-
??? 10
?
-
배너에 광고뜨길래 얼만지 궁금해서 봤더니 월당 2187000원에 컨텐츠비 급식비...
-
와 또큰일났다 5
체중계 고장난거아닌가 이정도 상승세면 올해안에 앞자리 두번바뀌겠는데 방금 하늘보리...
-
?
-
고려대합격 5
고대합격인증합니다 피오르 agent k 컨설턴트님 덕분에 스나 성공햇습니다 감사합니다!!
-
신청해서 발급까지 됐는데 적용방법을 몰라요...
-
사수 의미 없나요
-
영어 수특 vs 기출 16
고3 내신에도 도움될거같아서 수특도 보려는데 제가 아직 기출도 안본 영어고자라서...
-
연휴에도 통역 하느라 피곤한 뫼옹~
-
강대 본관 질문 0
강사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인거 같은데 반 레벨 상관없이 강사 다 선택할 수 있는건가요?
-
너무어려워 2컷 아깝농
-
안녕히계세요 8
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중에 올게요
-
도니 없다 도니 없어
-
각잡고 모이면 ㄹㅇ 스터디그룹 되겠는데 설대 연세 고려 서강 성균 한양 중앙 경희...
-
대학커뮤니티 노크에서 선발한 한국외대 선배가 오르비에 있는예비 한국외대학생,...
-
허수는 게임못해서 씹덕겜 같이 못한다 선언 피파도 용혁이 보다 못하는것같다 발언...
-
여긴 도대체 얼마를 내야할까 1기라서 장학같은거 나름 퍼주긴 할 거 같은데 강대의대관 따잇하려면
-
전장 되네
-
나 예루살렘~!
-
정확히는 과탐공부량으로 사탐하면 만점 날먹임? 아무리봐도 과탐하려면 국수영...
-
분명 설 연휴고 당연히 가는게 도리인데 이걸 왜 나는 고민하고 있지,, ㄹㅇ 후레 자식인가.....
-
와 큰일낫다… 5
잘멋하면 시대재종 못갈수도있겠는데…? 국어수학만 합쳐도 벌써 5네…
-
1일차 : 삿포로 시내 2일차 : 아사히카와로 이동, 택시투어로 패치워크의 길에...
-
과탐을 투과목 두개로 가는분들이 많이 계신가요??? 13
서울대만을 바라보는 분들인거죠???
-
와이어 꽂혀있는데 통신이 왜 안된다는겨
좋은 글입니다
와 칼럼 너무 좋아요
맞습니다 24번의 2번은 분명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